행동주의
이것은 새로운 사상이다. 동물이 갖게 될 습관들이 신체기관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에 신경센터에서 정해진다. 만일 이 정신적 부분이 미리 존재하고 있다면,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말은 곧 신체기관이 정신, 즉 본능의 필요에 따라 스스로를 다듬어가면서 건설을 마무리한다는 뜻이다. 이런 식의 추론은 동물이 태어나기도 전에 습성이 이미 정해져 있으며 신체기관들은 이 습성과 본능들을 성취하기에 가장 적합한 쪽으로 형성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 새로운 이론에 따르면, 자연에서 중요한 것은 동물들의 버릇과 습관이다. 어느 동물이든 신체기관들이 본능의 명령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족으로 형성된다는 학설은 참으로 흥미롭다. 이 새로운 이론은 수년에 걸친 연구와 사실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얻은 것이며, 기존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예전에 관심의 초점을 맞췄던 육체의 형태보다 동물의 버릇이 더 중요 하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게 만든다. 이 사실들을 일반화하는 데 쓰인 용어가 바로 '행동'이다. 행동은 동물들의 버릇과 습관까지 포함한다.
이 새로운 이론은 특히 미국에서 '해동주의' 로 넓리 알려져 있다.
행동주의는 과학 분야에 등장한 새로운 횃불이다. 동물들이 환경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습관을 들이게 된다는 옛 사상은 뒤로 물러났다. 옛 이론은 육체가 환경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변형을 촉진하는 것은 성체의 의지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동물들이 살아 남기 위해 펴는 노력, 즉 '자기보존 본능' 이 대를 이어가며 변화를 야기하며, 따라서 그 종이 환경에 적응하게 돤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 적응을 제대로 못하는 좋은 사라지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적자생존' 을 통해서 일종의 완벽성이 성취되며, 이 완벽성이 그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주장을 폈다.
새 이론은 이 모든 주장을 폐기하지는 않지만, 동물의 행동을 그 동물의 모든 습관의 중심에 놓는다. 관찰된 사실들에 따르면, 적응을 위해 노력하는 동물이 적응에 성공하는 경우는 그 노력이 그 동물의 행동 패턴 안에서 이뤄질 때뿐이다. 그렇다면 환경 안에서 삶의 경험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동물은 이 행동노선에 따라 경험을 수행하다는 뜻이다.
소를 예로 들어보자. 소는 힘이 센 동물이다. 무장도 잘 갖추고 있다. 지구의 지질학적 역사를 통해, 소가 진화해 온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소가 처음 등장한 것은 식물이 이미 지구에서 잘 자라고 있을 때였다. 그렇다면 소가 하필 소화시키기 힘든 풀만을 먹는 쪽으로 스스로 제한을 둔 이유는 무엇인가, 하고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미련한 동물이 풀을 소화키려고 4개의 위를 발달시켜야 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 같은 궁금증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만일 옛 이론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자기보존, 즉 생존의 문제였다면, 주위에 풍부했던 다른 먹이를 먹는 것이 훨씬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돈 소는 여전히 우리 주위에서 풀을 뜯고 있다. 소들은 언제나 머리를 떨어뜨린 채 서서 씹고 또 씹으며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소의 아름다운 눈을 들여다보기 위해 소가 머리를 들도록 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러는 당신에게 소는 눈길을 한번 주고는 다시 머리를 아래로 낮춘다.
이 동물을 유심히 관찰하면, 소가 풀을 뿌리 근처에서 자른다는 사실이 확인될 것이다. 식물을 뿌리 근처에서 잘라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뿌리까지 뽑으면 풀이 죽어버릴 것이다. 반면 그런 식으로 뿌리 근처에서 잘린 풀은 땅 속으로 더욱 멀리 뻗어 갈 것이다. 뿌리가 확장되며 더 많은 땅을 차지할 것이고, 그러면 풀은 죽기는커녕 더 멀리까지 여행할 것이다. 여기서 진화의 역사를 공부한다면, 풀은 지구의 역사에서 아주 늦게 나타났으며, 풀이 다른 식물들의 생장에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이 확인될 것이다. 그 이유는 풀이 바람에 쉽게 날아가 버리는 모래알들을 단단히 묶어주기 때문이다. 풀은 땅을 단단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땅을 비옥하게 만들기도 한다.
만일 소가 의식을 작고 있다면, 소는 단지 자산이 배가 고프고, 자신이 풀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을 알 것이다. 인도 사람들이 차파티(둥글납작한 인도의 밀가루 빵)와 쌀밥과 카레를 좋아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외의 다른 것을 좋아하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그러나 분명히 소는 자신이 일종의 농업가라는 사실을 절대로 깨닫지 못할 것이고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사실을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소의 행동은 농업의 일을 통해서 자연을 돕고 있다.
이제 자연의 쓰레기를 먹는 까마귀와 독수리의 예를 보자. 세상에 다른 먹이가 풍부한데도 왜 독수리는 썩은 시체를 먹어야 하며 까마귀는 남의 배설물을 먹어야 하는가? 왜 독수리와 까마귀는 환경에서 발견되는 온갖 더러운 것만을 먹는가? 이 새들에겐 날개가 있다. 그러기에 먹이를 찾아 멀리 날아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새들에겐 더 맛있는 먹이를 찾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들보다 힘도 약하고 이동 능력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다른 동물들이 그렇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그러나 이 쓰레기가 땅에서 치워지지 않을 경우에 사망률이 얼마나 더 넢아질 것인지 상상할 수 있는가?
만일 환경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이 삶의 유일한 임무인 그런 존재들이 없다면, 온갖 종류의 질병이 얼마나 더 많이 번지겠는가? 그런 존재들은 태생적으로 환경을 청소하는 임무를 할당 받았다. 인도의 아마다바드에서 일을 끝내고 공장을 나와 집으로 향하고 있는 근로자들의 무리와 자연 속에서 청소 작업을 끝낸 뒤 저녁 어스름에 보금자리로 날아가고 있는 까마귀 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 그것이 바로 그들의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