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태아의 삶
태어날 때 아이는 이미 정신적 삶을 부여받은 상태라는 점을 여기서 다시 강조하고 싶다. 그렇다면 이 정신적 삶이 출생할 때 시작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만일 정신적 삶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미 태아의 내면에 갖춰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정신적 삶이 아이가 출생할 때 아이에게 있을 수 있겠는가? 또 태아에게도 정신적 삶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태아의 삶의 어느 단계에서 정신적 삶이 시작되는가, 하는 궁금증이 생겨날 것이다. 일부 예를 보도록 하자. 아이가 9개월을 다 채우지 않고 7개월 만에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칠삭둥이도 이미 신체가 완벽한 상태이기 때문에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칠삭둥이도 이미 신체가 완벽한 상태이기 때문에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칠삭둥이의 정신적 삶도 9개월에 태어난 아이의 그것만큼 작동한다. 이 문제를 계속 논하고 싶지는 않다. 거나 내가 모든 삶은 정신적 삶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태아조차도 정신을 갖고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 예를 통해서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모든 유형의 생명은 그 생명의 형태가 아무리 원시적인 상태에 있을지라도 특정한 양의 정신 에너지를, 특별한 종류의 개인적 정신을 갖고 있다. 단세포 동물들에게도 일종의 정신 같은 것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단세포 동물도 위험을 피하고 먹이 쪽으로 이동할 줄 안다. 예를 하나 제시한다면, 녹조라 불리는 단세포 존재가 있다. 이 작은 존재는 물 속에 있는 그 많은 식물 중에서도 특별한 어떤 수초만을 먹고 산다. 그렇다면, 녹조는 이 식물을 선택하면 녹조는 구체적인 어떤 행동을 부여받았음에 틀림없다는 뜻이다. 모든 동물은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특별한 방법을 갖고 있으며, 이 같은 사실은 동물의 행동이 특별한 형태의 정신의 지휘를 받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엄격한 과학 분야를 잠깐 벗어난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신적 지휘자 같은 존재가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야 할 모든 활동을 다양한 유형의 생명들이 나눠 맡아서 하도록 분배하고 있다고 말이다. 달리 표현하면, 오늘날 생명은 어떤 위대한 에너지로, 우주를 창조하는 에너지로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면 갓 태어난 아이도 정신적 삶을 부여받은 상태라는 말에 우리가 놀라야 할 이유가 있을까? 만일 아이에게 정신적 삶이 없다면, 아이가 어떻게 살아 있겠는가?
이 같은 결론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 전까지는 아이에겐 정신적 삶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정신적 삶을 부여받는다는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연구하기 시작했다.
만일 어떤 존재가 정신적 삶을 부여받았다면, 그 존재는 외부로부터 인상을 받는다. 그렇다면 아이는 태어날 때 엄청난 충격을 경험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는 새로운 관점이며, 사상가들로 하여금 살아 있는 어떤 존재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이 환경에서 완전히 낯선 다른 환경으로 내던져지는 출생의 드라마와 정신적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의 조건을 고려한다면, 환경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훨씬 더 강하게 다가올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는 아직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상태이다. 정말로 아이를 주의 깊게 들여다볼수록, 아이가 육체적으로 아주 불완전하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확인될 것이다.
아이의 모든 것은 미완이다. 아이가 이 땅 위를 걸으며 세계를 정복하도록 할 다리도 여전히 연골 상태이다. 강력한 보호가 필요한 뇌를 둘러싸고 있는 두개골도 마찬가지이다. 갓 태어난 아이의 머리는 아직 경화되지 않았다. 뼈들 중에서도 몇 개만 발달했을 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경 자체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의 지휘가 부족하고 따라서 신체기관들 사이의 통합이 이뤄지지안은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뼈가 아직 발달하지 않은 이 존재는 움직이고 싶은 충동을 실행에 옮기지도 못한다. 모든 충동이 신경을 통해 전달되는데 신경들이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다른 동물들은 태어남과 거의 동시에 걸을 수 있는데도 사람의 신생아는 전형 움직이지 못한다.
결론은 이렇다. 출생할 당시에 아이는 여전히 태아의 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가 출생 후 상당 기간까지 태아의 삶을 사는 것으로 봐야 한다. 중대한 사건, 즉 아기가 전혀 다른 새로운 환경으로 던져지는 출생이라는 위대한 모험 때문에, 이 삶이 방해를 받을수 있다. 출생이라는 변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섭다. 그것은 어떤 존재가 지구에서 달로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이 위대한 걸음을 떼기 위해, 아닌 엄청난 육체적 노력을 펴야 한다. 아이가 이런 힘든 경험을 거친다는 사실은 대체로 고려되지 않고 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사람들은 오직 엄마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아이를 낳는 것이 엄마에게 아주 힘든 일이라는 생각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보다 훨씬 더 큰 시련을 통과한다. 이 아이가 신체적으로 완전하지 않은데도 정신적 삶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 시련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질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의 정신적 기능은 아직 발달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하도록 하자. 이 정신적 기능은 아이가 스스로 창조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도 아직 완전하지 않은 이 정신적 태아는 자신의 정신적 기능들을 창조해야 한다.
이 방향으로 계속 추론하도록 하자. 힘돈 없고 걷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태어난 이 인간 존재는 운동으로 이어질 어떤 행동을 부여 받았음에 틀림없다. 아이의 기능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창조되어야 하며, 이 기능들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은 곧 태아적인 삶의 시기가 추가로 전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적 태아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이다.
육체적으로 불완전하게 태어난 신생아는 인간이라는 복잡한 존재를 완성해내야 한다. 아이가 인간의 정신적 기능들을 스스로 창조해내야 한다는 뜻이다.